좋은 詩

고백 /이생진 외 #

청원 이명희 2017. 9. 9. 09:31

 

 

 

고백 / 이생진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당신 / 서종택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땅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여전히 처녀림인 곳 반평생 항해 끝 한쪽 발이 먼저 밟은 땅 되돌아갈 길 없이 가죽끈도 없이 꽁꽁 내가 묶인 땅 단 한 번의 애무로 빛과 그늘 속 아무도 모르게 나를 숨긴 당신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 정끝별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줄 포식자를 깜빡깜빡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통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당신의 바람 /김용택 오늘도 새벽 창문을 엽니다 이상한 바람이 건듯 불었습니다. 그 품에 안기면 모든시름이 녹아버릴 것 같은 따스한 바람이었어요 당신의 품이런듯 눈을 감고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숨은 꽃 / 김혜숙 제일 처음 발견한 자에게만 하나의 커다란 놀라움이 되고 싶어 나는 항상 숨어 사는 꽃이어요 가까이 다가와 허리 굽혀 들여다보는 자에게만 흐뭇한 위안이 되고자 나는 언제나 숨죽이고 있는 향기여요 애써 찾는 자에게만 그 눈에 뜨이고 싶은 나는 제일로 키 작은 꽃이어요 아주 미미한 죄끄만 꽃이어요 그러나 나는 또 늘 눈뜨고 있는 꽃이어요 아, 나는 당신에게서만 이름을 지어 받고 싶은 그래서 아직은 이름도 갖지 못한 꽃이어요

 

내 목숨꽃 지는 날까지 / 용혜원 내 목숨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겨우내 찬바람에 할퀴었던 상처투성이에서도 봄꽃이 화려하게 피어나듯이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내 마음도 마음껏 풀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이라면 한동안 모아두었던 그리움도 꽃으로 피워내고 싶습니다 행복이 가득한 꽃향기로 웃음이 가득한 꽃향기로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뒤쫓아오고 내가 어디를 가나 그대가 앞서갑니다 내 목숨꽃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지는 날까지 아무런 후회 없이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