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이명희
2018. 9. 13. 20:03
풀잎의 기도 ... 도종환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 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나가지 못했다
나는 세속의 길과
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원수와도 하루에 몇 번씩 악수하고
나란히 회의장에 앉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의지하는 신이
같은 분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침묵했다
일찍 깬 새들이 나 대신 새벽 미사에 다녀오고
저녁기도 시간에 풀벌레들이 대신
복음서를 읽는 동안
나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논쟁을 하거나
썩은 물위에 몇 방울의 석간수를 흘려보내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때도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풀들을 보았다
풀들은 말없이 기도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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