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바람의 증언 / 구석본

청원 이명희 2018. 10. 24. 19:35

 

 

 

 

        바람의 증언 / 구석본 내가 없었다 당신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향기와 빛깔이 모여 두근거리는 꽃, 그 앞에서 둥글고도 부드러운 나를 흔들기 시작하여 아랫도리부터 머리꼭지까지 흔들어도 당신들의 눈에는 꽃의 향기와 빛깔만 보일 뿐 매끄럽고 은밀한 나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영혼은 없었다.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과 쓸쓸함이 갈퀴를 세우고 짐승처럼 숲 속에서 나무와 나무 사이를 휘저으면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나뭇잎만 있었다.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울음 울지만 절벽마다 소리의 깃발을 내세워 한세상 살아가는 정신으로 펄럭이지만 언제나 당신들의 메아리였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내 몸과 영혼은 허공일 뿐이다. 그 허공 속을 꽃의 향기와 빛깔이 두근거리며 지나가고 당신들의 외로움이나 쓸쓸함도 지나간다. 사실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지워지는 영상같이 스르르 허공 속으로 스며들어 눈부신 하늘의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월간『현대문학』(20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