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시과 / 오봉옥

청원 이명희 2018. 9. 13. 19:00

 

 

와삭! / 오봉옥 사람은 자궁을 나오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며 生을 시작하지만 사과는 탯줄이 잘리기도 전에 벌레들에게 방을 내주며 고단한 生을 시작한다. 사과는 허공이 고향이다. 바람이 탯줄을 자르면 사과는 그만 집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럴 때면 산다는 것도 저렇게 막막한 허공 속에서 흔들리다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연둣빛 사과는 부끄러움도 없이 내보인 어린 소녀의 젖망울을 떠올리게 하고 붉은 사과는 사내 맛을 알아버린 젊은 새댁의 달아오른 입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사과 한 개 그냥 붉어진 게 아니라는 것. 쇠가 물과 불 속을 오가며 망치질로 단단해지듯 사과는 새벽 찬 공기와 대낮 뜨거운 햇탕을 오가며 바람의 망치질을 견디는 것으로 살을 채운다. 자, 이제 한입 깨물어 봐라. 이것이 사과다! ―계간『시산맥』(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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