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바닥, 박성우 외 #

청원 이명희 2019. 4. 10. 19:02

 

 

어느 해 봄 그날 술자리였던가 그 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불취불귀, 허수경

 

 

 

 

 

 

 

나는 조용히 미쳐가고 있었다 물컵 안에 뿌리내리는 양파처럼 골방에 누워 내 숨소리 듣는다 식어가는 유성의 궤적을 닮아가는 산 짐승의 리듬이 빈방으로 잘못 든 저녁을 잠재우고 있다 물질의 세계로 수렴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붕대 같은 어둠이 있어 너에게 사행하는 길 썩 아프지 않았다 잠시 네가아니라 끈적끈적한 입술을 섞던 어느 고깃집의 청춘을 떠올린 것만이 미안했다 담배 연기에 둘러싸인 너의 형이하학과 당신 배꼽 안에서 하룻밤 머물면 좋겠다던, 철없는 연애의 선언만을 되새겼다 이토록 평화로운 지옥에서 한 무명 시인이 왕이었던 시절 세상은 한 권의 책이고 그 책엔 네 이름만이 적혀 있었을 때 나는 온누리를 사랑할 수 있었지 데워지지 않은 슬픙이 통째 구워진 생선간이 구부러진 젓가락 아래 삼켜지길 기다리고 있다 해도 한 장의 밤을 지유개의 맘으로 밀며 가는 내가 있다 너의 비문들을 나에게 다오 네게 꼭 맞는 수식을 붙이기 위해 괄호의 공장을 불태웠지만 어디에소 살아서는 깃들 수 없는 마음 네 앞에서 내가 선해지는 이유 애무만으로 치유되지 않는 아품이 산다는 게 싫지 않았다 나를 스친 바람들에게 일일이 이름표를 달아주었지 너에게 골목하는 병으로 혀끝이 화하다 조용히 미쳐가고 있다 나는 13월의 예감, 이현호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반음계, 고영민

 

 

 

 

 

 

 

뭔가 남겨질 일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녹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오래된 도시의 교각 밑을 걸으며 버려진 채 주저앉은 폐차 옆을 지나며 저것들도 누군가의 후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호기심에 제비집을 허물고 아버지에게 쫓겨나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하룻밤을 보낸적 이 있었다 감당할 수 없이 두렵고 외로웠으며 바닥에 내팽개쳐진 빨간 제비새끼들의 절규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런 밤이었다 그 날 나는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처음 뼈아픔이라는 단어를 이해했고 그 날밤의 악몽은 철든 시절까지 날 괴롭혔다 절대로 묻혀지거나 잊혀지지 않는 일이 존재한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는 살면서 앙금을 남겼다 후회한다 모두 덮어버리고 싶다 내가 짓고 내가 허물었던 것들을 무념무상으로 살지 못했던 날들에 대해 나는 후회한다 후회에 대해 적다, 허연

 

 

 

 

 

 

 

사랑의 빛 위로 곤충들의 만들어 놓은 투명한 탑 위로 이슬 얹힌 거미줄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러져간다 가을 나비들의 날개짓 첫눈 속에 파묻힌 생각들 지켜지지 못한 그 많은 약속들 위로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한때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 나는 삶을 불태우고 싶었다 다른 모든 것이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릴 때까지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빨라 내게서 멀어졌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여기,거기,그리곤 모든 곳에 멀리,언제나 더 멀리에 말해 봐 이 모든 것들 위해 넌 아직도 내 생각을 하고 있는가 사랑의 기억이 흐려져간다, 류시화

 

 

 

 

 

 

 

다 잊고 산다 그러려고 노력하며 산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가슴이 저려올 때가 있다 그 무언가 잊은 줄 알고 있던 기억을 간간히 건드리면 멍하니 눈물이 흐를 때가 있다 그 무엇이 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못다한 내 사랑이라고는 한다 다 잊고 사는데도, 원태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 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 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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