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빗방울 경전 /김수우

청원 이명희 2018. 7. 26. 18:26

 

 

빗방울 경전 /김수우 비가 온다 잘 지냈나 익숙한 주문처럼 내리는 비, 나도 그들을 잘 안다 과일장수 아버지는 비가 오면 다섯 살 딸을 사과박스에 뉘고 비닐을 덮어 짐자전거에 실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부터 빗방울을 사랑했다 홀로 걷는 법 함께 내려 앉는 법 정직한 슬픔을 토닥토닥 배웠다 한때 빛을 키우던 지느러미들, 한때 날개를 고르던 새들 비가 오면 포장마차에 앉는다 빗방울 당도하는 소리 속에서 천천히 빗방울이 된다 단추도 되고 단춧구멍도 되던 빗방울 유리창도 되고 바다도 되던 빗방울들 남비에서 끓는다 홀로 푸는 법 함께 풀리는 법 정직한 슬픔이 보글보글 떠오른다 저주를 푼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알아보는 일이다 오래, 아무리 모질게 잊혀져 있더라도 금세 알아본다 막다른 골목 유행가도 삐걱대는 관절도 천박한 자유도 불완전한 마술도 새우깡 흘린 노숙의 자리도 싸구려 강박증도 빗방울이 된다 자박자박 낮은 발길이 된다 어떤 저주든 아름답게 풀어낼 수밖에 없는 몇 생애 내 어머니이기도 했던 홀로 걸어와 함께 내리는, 저, 이방인들 슬쩍 지나도 그림자조차 없어도 그들을 잘 안다 냄새와 그 유영이 익숙하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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